대한민국 만년필, 베개
K 팝이 전 세계 차트를 점령하고, K 푸드가 전 세계 식탁을 사로잡고, K 드라마가 전 세계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는 소프트 파워 강국, 대한민국에는 그런 만년필이 없다.
우리 수준의 문화와 우리 수준의 경제와 우리 수준의 제조업 기반에서 그 수준에 도달한 우리 만년필이 없다.
워터맨이 최초의 근대적 만년필 The Regular 를 세상에 소개한 이래로 미국, 유럽은 물론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도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자국 만년필이 있다.
그래서, 만년필을 만들기로 했다.
만년필 100년의 역사를 존중하되,
첫째, 겁먹지 말 것
둘째, 현대적 일 것
셋째, 한국적 일 것
선두 주자의 앞선 시간 100년에 압도되면, 컨셉, 디자인, 라인을 자신도 모르게 모방하게 되고, 결국 또 하나의 비슷한 만년필을 만들게 된다.
한 번도 만년필을 디자인해 보지 않은 산업디자이너와
만년필을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소재 공학 전문가로
만년필을 모르는 만년필 팀을 발족했다.
대한민국 최고 만년필 전문가, 박종진 만년필연구소 소장의 감수와
대한민국 최고의 무대뽀 기획자 김어준의 무모함이 결합되었다.
만년필 브랜드 파커는 1965년 플로리다 앞바다에서 인양된 스페인 보물선에서 나온 은으로 세계 최초의 한정판 'Spanish Treasure' 만년필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물선은 1976년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인양되었다.
신안 보물선, 14세기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에 2만점이 넘는 도자기가 가득했다. 그 많은 원나라 도자기들 사이에, 고려청자 7점이 있었다.
그중 청자 상감 모란 구름 학무늬 베개를 발견한 순간 무모한 기획자 김어준은 이렇게 외친다.
'이거다'
그렇게 만년필을 모르는 만년필 팀은 고려청자 베개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얻어, 그 문양과 비례와 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전통매듭을 형상화 한 촉,
고려청자 베게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립,
비녀의 유려한 라인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배럴,
그립의 소재는 우수한 내부식성과 무게감을 위해 스테인레스 스틸 316L,
배럴은 충격 흡수에 강하고 내구성 뛰어나며 UV 저항성이 높아 변색이 되지 않아 자동차 대시보드와 노트북 외관에 사용되는 ABS Amorphous Thermoplastics 을 채택했다.
베개 디자인의 중심인 그립은 3D 프린팅 기술로 출력되어 국내에서 조립된다.
만년필의 핵심 부품인 촉과 컨버트는 독일 최대 만년필 부품업체 SCHMIDT 가 공급한다.
특징으로,
클립을 제거했다.간결하고 심플하게 본체에는 로고만 있다.
무게 중심을 직선문자 한글에 맞게끔 전체 무게의 50%가 그립파트에 분배된 최초의 만년필이다.
만년필마다 각각 다른 고유 번호가 각인된다.
박종진 만년필 소장이 촉의 마감을 직접 감수하고 터치한다.
그립과 같은 규격으로 스크레치 방지용 SF 코팅된 금속형 펜레스트를 제공한다.
제품은 두 종류다 18K 펜촉 적용 블랙 컬러 모델과, 스틸 펜촉 적용 화이트 컬러 모델이다.
나는 블랙 18K 모델 한자루를 구매했다.
경험해 보고 싶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만년필과 만년필을 모르는 팀이 만든 만년필, 그리고 무모한 기획자가 세웠던 전략이 어떻게 현실화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언제 구매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언제 물건이 배송될 지도 기약이 없다.
그런데 소비자인 나는 아무리 경험과 아티클 작성을 위해 구매를 했다지만, 화가 나지도 않고 이렇게 뉴스레터에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난 무모한 기획이 좋다.
2.만년필을 좋아한다.
3.K-만년필을 시도한 것의 의미에 동의한다.
4.소장가치가 있다.
5.경험 연구자에게 필요하다.
이번 뉴스레터는 백제의 옛 도읍지 사비,
부여에 워케이션을 와서 작성했다.
지금 이글을 쓰는 곳은 사비123 창작센터에 마련된 창작스튜디오다.
오기전 까지는 아이디어가 없었는데,
결국 무모한 기획자를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커밍아웃하건대,
난 무모한 기획자 김어준이 부럽다.
그의 무모한 용기가 진심 부럽다.
나의 무모함을 뛰어넘는 그의 무모함에 일단 졌다.
이 만년필 프로젝트는 무모한 시도의 끝장판이다.
이미 제품은 매진되었고, 다시 추가 제작 해달라는 원성만 겸손몰에 가득하다.
이 프로젝트의 결말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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